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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왜 가난해야하는가? - 예술의 신화성과 그 대안으로서의 NFT dbrua3891 2021년 10월 20일

예술세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그리고 예술가들 스스로도 이상하리만치 빈곤함에 관대하다. 우리가 현재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삶 속에서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르는 것은 꽤나 자연스러우며, 보다 나은 생계와 작업활동을 위해서도 필연적일 것이다. NFT나 아트페어와 같은 상업적 시스템이 그를 위한 완전한 대안으로 작용해줄지는 아직 불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오히려 예술을 한정된 틀에 가두는 예술의 신성성의 붕괴에는 한 몫하는 기폭제가 되어줄 수 있음을 기대한다. 그럼으로써 예술가가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존재하기를 바란다.

 
예술은 위대하다. 예술가의 예술행위는 숭고한 것이므로 세속의 유혹을 끊임없이 극복함으로써 예술의 순수성을 추구해야 한다. 언제나 기성 사회의 안티테제로서 시대의 대변자로 역할해야 하며, 또 문화 발전을 통한 국민들의 사회적 결속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을 깊이 새겨야 한다. 자본, 그리고 대중과 타협치 않는 고집불통의 외골수가 자유로운 진정한 예술가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라는 기표가 갖고 있는 신화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음의 자기목적적인 예술을 추구하면서 예술의 순수성을 고수해야 하고, 자본을 경시해야 하며, 사회참여적인 예술로써 도덕적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이러한 절대적인 덕목이 지켜져야만 예술계의 주류 사회에서 ‘진정한 예술인’으로서 동료에 의한 인정, 비평적 인정, 화랑과 컬렉터로부터의 후원, 그리고 대중들의 갈채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와 보자. 예술가가 끊임없는 자기 착취를 감행할 만큼 예술에 덧입혀진 신화에 동조해야 하는가? 예술의 신성성에 통감하지 못하는 비예술인들(대중)과 대중적 채택을 받지 못해 가난에 허덕이는 예술가들에게는 이러한 신화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2018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예술가가 예술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연간 평균 1,281만 원으로 한 달에 100만 원 남짓의 수익창출을 얻는다는 결과이다. 이는 같은 해 최저임금제 기준 연간 수입액이 약 1,888만 원인 것과 비교하면 그 수준이 매우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의 내적 가치도 물론 중요하다. 예술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감각적인 경험과 성찰을 일깨워주고 시대정신을 반영해준다. 때로는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일상적인 삶의 고단함으로부터 도피처가 되어주는 것이 예술이다. 진정성 있는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예술가가 우리 사회에 필요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예술이 실제로 구현되는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데다가 예술이 자본과 상업성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예술의 내적가치가 상승한다는 등식도 맞는 얘기라 할 수 없겠다. 예술의 성장도 수요와 공급의 경제 원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미술의 역사는 미술의 전성기가 항상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칭키즈 칸이 중국 전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유럽 등 전 세계의 절반을 장악하였던 12세기는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이 활발해지고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미술 또한 황금기를 맞았던 시기였다. 르네상스 태동의 배후에는 이탈리아의 무역 발달로 인해 금융업을 발달시킨 메디치가의 후원이 있었고, 현대미술의 수도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기울던 것도 20세기 미국의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함께였다. 현대 시대에 들어서 자본이 미술의 절대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었다고 통탄하지만, 이는 비단 작금의 현상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사는 언제나 자본 논리에 영합하여 전개되어 왔다. 과거에는 종교적 논리, 국가주의적 논리 등에 가려져 있단 시장 경제의 민낯이 더 솔직한 모습으로 노골적이게 드러난 것뿐이다. 그럼에도 예술은 ‘안티 자본’을 지향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술의 신성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예술의 신화는 현시대의 주류 미술계의 미술관과 그와 관계된 작가들, 큐레이터, 평론가, 화랑, 언론 사이의 끊임없는 공모 속에서 그들의 견고한 권위를 위해 유지되는 듯하다. 이들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을 종별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원체 예술은 ‘구별 짓기’를 위한 문화적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음을 상기해보자.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고급과 저급, 순수예술과 상업예술과 같은 이분법적 구조의 ‘포함과 배제’의 논리에서 예술은 고상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고상함은 곧 예술계 구조 내부에 존재하는 권력의 표상이고, 모순적이게도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권력은 자본의 독점으로 이어진다. 이는 미술계뿐만 아니라 전통예술, 서양음악, 영화 등 장르를 막론하고 예술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네덜란드 예술가이자 경제학자인 한스 애빙은 그의 저서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에서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Amsterdam's stedelijk Museum)이 독일의 자동차 기업인 아우디의 자금 지원 제안을 ‘예술의 자율성 침해’라는 명목으로 거절한 사례를 들어 이렇게 얘기한다.

 
 “예술세계는 상업성을 혐오하기라도 하는 듯한 고상한 태도가 발견된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이라는 신성한 사원 역시 시장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임을 안다. 사실 시장 거래는 예술이라는 사원을 지탱하고 있는 기반이다. 그럼에도 예술세계는 예술의 신성함과 이러한 상업성이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상업성을 외면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기도 한다. 우리는 상업성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상업성을 추구하는 예술세계의 이중적인 얼굴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요컨대 예술가는 가난함과 함께 예술에 죽고 예술에 사는 외골수로 캐릭터 설정되는 진부한 클리셰, 빈곤의 절박함 속에서 오히려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언더독 신화는 지나친 허상이다. 현시대의 예술가들은 자본과 보다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상업성을 추구해야 할지 모른다. 자본만을 맹종하고 배금주의를 쫓으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와 기법으로 대중들을 설득하고 시장경제를 영리하게 활용하기 위한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근래에는 그러한 고민을 투영해볼 환경이 늘어나고 있다. 소위 MZ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세대들의 미술품 투자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짐에 따라 미술품 가격과 상징적 진입장벽이 높던 갤러리 중심의 중앙화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미술시장이 다각화되는 중이다. 그러한 변화 속 아트페어(Art Fair)와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능한 토큰)가 미술품 거래에 대한 대중적 수요와 예술의 다양한 상업적 시도를 충족시켜줄 시스템으로 기대해볼 수 있겠다. 

 

 


 

  예술가 개인들과 다양한 규모의 화랑들이 모여 예술품의 판매를 주목적으로 하는 행사인 아트페어는 이미 국내외로 큰 관심을 받으며 주류 예술품 거래 시스템으로 자리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첨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최근에 ‘Beeple’이나 국내의 ‘미스터 미상’과 같은 디지털 아티스트들의 NFT 작품이 초고가 판매 행진을 보이며 기업과 미술 애호가들에게 전폭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NFT에 대해서는 그 시스템의 구조에 관해 소략하게나마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Nft는 암호화폐를 기반으로 하는 Defi(탈중앙 금융시스템, Decetralized finance)에서 대체불가능한 재화의 기능, 즉 희소재를 구현할 수 있게 돕는 블록체인 시스템의 일종이다. 게임 아이템, 음악, 디지털 미술품, 수집품, 메타버스 부동산 등의 디지털 재화들이 있는데, 그중 디지털 미술품이 누군가의 소유가 되는 프로세스는 이러하다. NFT를 기술적으로 구현하는데 필요한 표준 프레임워크인 'ERC-721'은 JPG 또는 GIF 등의 파일로 존재하는 디지털 아트에 고유한 인식값(ID)을 적용하여 여타 복제된 디지털 파일과 구별되는 희소가치를 만들어준다. 그러한 인식값과 작가 이름, 거래 내역, 디지털 파일에 접근 가능한 링크 등의 메타데이터, 그리고 소유자 변경 이록을 이더리움(NFT를 구동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탈중앙화 서버)과 같은 블록체인 메인넷에 저장한다. 그렇게 하여 블록체인에 불변하고 무결하게 데이터를 저장함으로써 디지털 파일이 미술품으로 거듭나 사고팔 수 있는 ‘희소재’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NFT화한 디지털 미술품들이 거래되고 있는 FoundationNiftygateway 및 국내의 MyTems, Canverse 등의 NFT 마켓플레이스들은 물리적 공간에서 개최되던 아트페어와 같이 그 자체로 온라인 미술품 거래장이다. 작품에는 이더리움 등의 암호화폐 단위로 가격이 첨부되고, 거래 이력도 열람되며 일정 기간 동안 경매도 이루어진다. 자본과 예술의 매우 노골적인 결합, 시장경제의 가장 맨 끝단에 서있는 예술 영역이라 할 수 있겠다. 

(1) 30K,Beeple  /  (2) The Bitcoin Angel ,Trevorjonesart

 

  NFT 아트마켓의 특징은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내재된 ‘소유’라는 자본주의적 욕망에 위선을 부리지 않고 매우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과 같은 암호화폐를 예찬하고 관련한 밈을 생산하며 확장시키고, 누적 거래액과 최고 거래액 및 거래 횟수 등의 데이터를 토대로 NFT 아티스트들을 순위 매기기도 한다. 또 어떤 아티스트들의 작품은 콜렉터로 하여금 차곡차곡 수집할 수 있도록 콜렉터블하게 표현된다. 소유욕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NFT를 거래하는 행위 자체는 아티스트와 콜렉터가 상호작용하는 일종의 '인터랙티브 아트'이기도 하다. NFT계의 스타작가인 ‘PAK’이 미국의 경매회사 Sotherby’s와 진행한 ‘The Fungible Collection’은 NFT 거래 행위를 통한 콜렉터와의 상호작용으로 작품을 구성한다. 가장 많은 PAK의 ‘NFT 큐브’를 모은 사람에게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NFT 작품을 수여하고 SNS를 통해 PAK을 가장 많이 언급한 사람에게, 일련의 수수께끼를 풀거나 경매에서 NFT 판매 총액의 가장 근사치를 예측한 사람에게도 히든 NFT 작품(The Equilibrium)을 수여한다. 또 특정한 NFT 소유자의 요청에 따라 작품의 형태를 변형하기도 하는데, 물성에서 자유로운 디지털 아트이기에 가능한 예술가와 콜렉터 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The Switch). 이 같이 단순히 작품의 거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상호작용을 통해 함께 작품을 구성해나간 NFT 경매는 16,825,99달러라는 판매액으로 마무리되었다. 

(1) The Fungible Collection, PAK  /  (2) The Equilibrium  

 이처럼 NFT를 기반으로 한 예술시장은 자본과 상호작용하는 예술을 얼마든지 시험해볼 수 있는 배경이 되어준다. 특히 디지털 아트는 복제가 얼마든지 가능한 디지털 네이티브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디자인,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2차 공정이 필요하였는데, NFT를 통해 디지털 작품에 고유성을 부여해주는 소유권을 내장함으로써 직접적인 거래가 가능해졌다. 또한 기존의 미술품 거래 구조와 차별되는 점은 기존 갤러리의 높은 중개 수수료나 작가로 등단하기 위한 진입장벽 없이 직접적인 수익을 안겨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자신의 작품이 거래될 수 있도록 마케팅에 부단히 노력하고 콜렉터 및 NFT 커뮤니티와 꾸준히 소통하는 등 새로운 문법에 맞춘 전략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반면에 예술이 상업성에 치중함에 따라 제기되는 문제점도 분명히 존재하며, 아직 미해결로 남아있는 기술적 한계나 제도적 한계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가장 많은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는 NFT 플랫폼 오픈씨(opensea)에 들어가 보면, 정제되지 않은 실력으로 구현한, 그다지 진지한 고민을 담지 않은 듯한 작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NFT로 판매되는 디지털 아트의 주된 표현기법인 콜라주 작업물이나 일러스트 또는 ‘Crypto Punk’의 궤를 따르는 콜렉터블한 작품들은 서로 엇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 물리적인 공간에서 물성을 갖는 실물 작품과 디지털 작품 간에 NFT 소유권이 호환되지 않음에 따라 발생되는 ‘소유권’ 개념의 모호함이나 타인의 작품을 임의로 NFT화 해서 판매함으로써 저작권이 심각히 위배되는 사례들이 이어진다. 또한 그 사이를 가려내는 기준이 애매하기는 하다만 좋은 예술가를 후원하거나 작품을 진정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투자와 비이성적인 투기가 혼재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막 태동하여 새로운 문법을 정립해나가는 예술 시장인 만큼 크고 작은 이슈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술가와 콜렉터 및 비평가들이 모여 ‘NFT 소유권이 작품에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까지 인가’, ‘단순한 소유를 넘어 게임 · SNS · 금융 · 커머스 등과 결합한 NFT의 사용성‘, ‘NFT의 저작재산권 및 저작인격권’ 등과 같은 담론들을 구축해나가는 노력에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 미술품을 향유하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상업성이 극단적으로 짙은 시장에서 예술의 다양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존재하는데, 이는 이제 막 콜렉터들이 좋은 NFT 작가를 판별해내는 시각과 자기기준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예단하기에는 이른 듯 보인다. 작품의 실제 거래까지 이어지는 결과가 굉장히 중요시되는 미술 시장이기에 콜렉터들이 기민한 시각을 가지고 시장에 임한다면 예술가도 그 기준에 어느 정도 충족하기 위해 보다 독창적인 고민과 고유한 기법을 작품에 담으려는 노력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작품 활동에 필요한 돈을 아르바이트 등 예술 외적 활동을 통해 충당한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특정 활동을 통해 돈을 버는 생산자’라기보다는 ‘작품 활동에 자신의 돈을 쓰는 소비자’가 되는 셈이다.”(한스 애빙) 

 

 예술세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그리고 예술가들 스스로도 이상하리만치 빈곤함에 관대하다. 우리가 현재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삶 속에서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르는 것은 꽤나 자연스럽고 태초적인 본능이며, 보다 나은 생계와 작업활동을 위해서도 필연적일 것이다. NFT나 아트페어와 같은 상업적 시스템이 그를 위한 완전한 대안으로 작용해줄지는 아직 불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오히려 예술을 한정된 틀에 가두는 예술의 신성성의 붕괴에는 한 몫하는 기폭제가 되어줄 수 있음을 기대한다. 그럼으로써 예술가가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존재하기를 바란다.  

 

 

김유겸(Gyeom)

Reference: 

1. <Why Are Artist Poor?: The Exceptional Economy of the Arts>, Abbing Hans(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예술경제의 패러독스).

2. <한국 미술가들의 ‘딜레마’와 ‘보편적 미학’으로의 길>, 박정애. 

3. <작가의 창작 윤리와 한국미술계의 구조>, 박영택.

4. <What is Crypto Art?: Crypto Art에 대한 개념적 고찰>

5. ‘2018 예술인실태조사 보고서’, 문화체육관광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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