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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결국 부유한 자들을 먹을 것이다" indrapinnata@naver.com 2021년 12월 7일

"사람들이 더이상 먹을 것이 없을 때, 그들은 결국 부유한 자들을 먹을 것이다." - 장 자크 루소

"그들은 결국 부유한 자들을 먹을 것이다"[1]

 - 도시의 행동주의 예술 그리고 언덕의 벌레막장

 

                                                                                                                                                     미술평론  이윤영

 

1. 초기 젠트리피케이션의 역사 (1960년대 런던과 1970년대 뉴욕을 경유하여)

 

2차대전 이후 넓은 정원이 딸린 교외 저택을 선택해 도심으로부터 빠져나간 런던의 중산층 부모세대와는 달리 도시의 첨단 유행과 독특하고 혁신적인 문화를 즐기기를 원하는 여피들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지역보다는 창의적 영감을 자극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원했다.

여피들은 편리한 장소에 매력적인 기간 주택이 있는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지만, 종종 개보수 작업이 필요하며 훨씬 더 가난한 지역들과 함께 더 가난한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도심과 변두리 낙후지역 사이의 극단적인 임대료 차이는 부동산 투기를 야기해 건물 개조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는 사람들이 빈민구역으로 몰려와 이러한 사회현상을 더욱 부추겼다. 젠트리피케이션은 하우스 리모델링, 인테리어, 구르메(맛집) 문화, 커뮤니티 네트워킹, 아마추어 부동산 투기 등 젠트리피어들의 독특한 문화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가 중산층 거주자들이 새로운 삶의 선택과 사회적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음을 시사한다. 젠트리피어들은 '도시 마을'의 아이디어를 홍보하여 도시 내부가 될 수 있도록 하고, 도시와 분리하여 편의시설은 가깝지만 사회 문제는 단절시켰다. 그 과정이 1960년대 후반부터 탄력을 받게 되면서 그들은 문화 생산자와 의견 형성자로서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자기 홍보, 풍자, 죄의식, 면죄부를 결합한 방식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의 과정을 논평했다. 따라서 엘렌 워드는 이를 '조직화된 자본'을 통해서가 아니라 중산층 개척자들의 '집단적인 사회적 행동'을 통해 일어났다고 보았다.[2]

 

이들 개척자들은 교육 및 문화 자본을 이용하여 이른바 '핫 스팟''-커밍' 지역의 지시적인 징후를 파악하고, 일단 입주한 재산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1960년대 중반까지, 그들은 새로운 삶의 선택과 사회적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주택 개조, 인테리어, 요리, 오락, 네트워킹의 스타일을 포함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많은 선구자들이 예술가, 작가, 언론인, 학계, 출판계, 건축가, 광고계, 텔레비전 임원 등 문화 분야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젠트리피케이션은 사회학적 과정일 뿐만 아니라 미디어 현상이었다. 젠트리피어 중 상당수는 좌파였으며, 이들이 대학이나 직장 문화에서 발전한 정치로, 노동자 계층에 정착하려는 의지가 어느 정도 작용했다.[2] 그들은 문화 생산자와 의견 형성자로서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그 과정에 대해 자기 선전, 풍자, 죄의식, 면죄부를 불안하게 결합한 방식으로 논평하였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간헐적으로만 정치적 논란의 소재로 등장했기 때문에 이번 문화 작업은 더욱 의미가 컸다. 루스 글라스가 1960년대 초 북런던의 사회구성이 변화한 것에 대한 그녀의 획기적인 분석에서 주장했듯이, 그것은 대체로 계획되지 않은 점진적인 과정이었으며, 전후의 매우 주도적인 도시계획이 쇠퇴하면서 생긴 정치적 공백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3] 중산층 주택 거래, 철거 및 개축이 완료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이러한 현상이 동시에 발생하지만 동일한 인근 지역의 서로 다른 사유지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과정이 공식적으로 확인되기 전에 전체 지역이 변형될 수 있었다. 이 초기 '젠트리피케이션'의 시기를 영국 문화사의 특정한 순간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 과정이 특히 의미와 상징성이 풍부했던 것은 부분적으로 그것이 항상 명확하게 명명되거나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문화 정치는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집 개축과 도시 보존의 기술, 인테리어, 미식가, 그리고 홈 엔터테인먼트를 포함하는 새로운 형태의 도시 생활방식, 집값 상승과 주거지역의 지위의 변화에 대한 관심, 그리고 종종 무의식적으로 젠트리피어를 문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1970년대의 맨하탄도 다르지 않다.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의 전환은 맨하탄 곳곳에 1970년대 중반 고급문화와는 거리가 먼 남동부 지역 창고는 갤러리나 스튜디오로 전용되면서 미술관계자나 예술가들에게 인기있는 터전이 되었다. 이후 시대에 뒤처진 산업창고와 부둣가 지역 일대가 급격히 쇠락하면서 가난한 예술가들과 소외된 성소수자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2. ”사람들이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을 때

 

 Thomson Lee, EAT THE RICH, 1970

 

 "Mural at Piers," artists in eastvillage,1983

 

Ralph Roomney " Psychogeographic Map of Venice " (1957, Photographic Collage).

 

도시를 횡단하는 예술실천의 역사는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황주의자들의 작업은 주로 콜라주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파괴되고 불완전한 이미지들을 복제하듯 나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이미지들을 덧붙임으로서 방향 전환을 기획하기 때문이다. 상황주의자들의 배회/표류를 통한 도시횡단 실천도 개인(도시인)의 무의식적 이동을 드러내고 통합된 도시 생활에서 파열되어 나타나는 상황이 벌어지는 장소로서의 도시환경, 사회적 상호작용 등을 보여준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날을 공동 창립한 랄프 룸니는 1957년 칼 융의 영향을 받은 콜라주 회화를 발표함과 동시에 베니스에서 베니스의 심리지리적 지도라는 콜라주 사진을 제작하는데, 이는 발길이 닿는대로 도시를 배회하여 지도를 재창안하는 상황주의적 실천이었다.

 

한편 1970년대 뉴욕시는 미국의 다른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다. 70년대 초 석유파동으로 국가적 경제위기가 있었고, 75년 뉴욕시의 재정이 바닥을 치면서 부도 가능성이 공식적으로 제기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위기 속에서 미국은 브래튼 우즈 체제의 종식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본격화함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했다. 70년대 내내 해외직접투자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다국적 기업의 융성에 밑거름을 제공했다. 기업은해외 진출, 해외공장의 설립 등으로 위기를 탈출하려 노력했는데, 이는 미국의 전반적 경향이었으며 국제적 기업이 많은 뉴욕시는 이런 변화의 영향을 좀 더 집중적으로 받았다. [3]

뉴욕시는 해외 파이낸스, , 보험 등 금융상품의 거래를 증진시켜 뉴욕시의 재정을 안정시켰고, 중공업,경공업 중심의 2차산업에서 3차산업으로 진입했다.  이러한 뉴욕시의 정책으로 인해 대규모 젠트리피케이션을 맞게 된 곳은 로어 이스트 사이드였다.

이 지역은 오랜 역사에 걸쳐 이민 집단의 거주지로 유명했으며 저렴한 임금 덕택에 저임금 노동자와 가난한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임대료가 비싼 그리니치 빌리지와 소호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이 로어 이스트로 옮겨오면서 화랑과 무도장, 공연장 등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전위적이고 조야한 예술, 로큰롤, 마약, 알록달록하고 펑퍼짐한 스타일의 의류. 등 히피의 반문화였다.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 산타나(Santana), 더 후(The Who),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가 고정출연하는 술집들과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업실이 그곳에 있었다. 그저 지리적 구역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일종의 정신상태, 혹은 문화적 현상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개념미술가들, 대지미술가, 플럭서스 등 폭발하는 시점이었고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곳곳에서 이들의 행동주의 도시 작업은 기존의 관습에 반발하는 형식으로 돌출되었으며 피터 후자르, 데이비드 워나로비치, 해리 셩크 + 자노스 켄터 등의 게이 사진작가에 의해 (흥미롭게도 주류의 문화에 배제된 이들에 의해!)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남아있다.

 

3. 벌레막장

 

언덕 <벌레막장> 포스터, 2020

 

 언덕 <벌레막장> 전시전경 부분, 벌레의 주름진 껍질 틈 사이로 빛바랜 아이의 사진이 엿보인다.

  

국내의 경우 젠트리피케이션은 선거구를 중심으로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여 새롭게 분양하고 주변 지역의 집값을 올리기 위한 시 정책으로 발생되는 경우가 많으며, 개발 이전에 해당 지역은 예술로 도시를 아트워싱하려는 관광산업 정책과 이러한 산업과는 다소 무관하고 때로는 젠트리피케이션 비판적이지만 그리고 지역의 독점적 문화세력과 기관의 협력(또는 유착)으로 레지던시의 운영하며 지역문화예술지원을 독점 수혜하고 더 나아가 지역에 공립 미술관을 설립하는 등 지역 예술인 세력의 공고화 등의 단계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 경력이 불문한 신진 작가들은 지역의 레지던시에 입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관 주도성 커뮤니티 아트의 반대편에는 기존부터 오랫동안 느긋하게 운영해 오던 작은 지역 갤러리들이 순수 문화예술사업으로서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약간의 보조금만으로 지역의 역사를 기록하고 이를 지역주민을 위한 동네미술, 커뮤니티 아트에 다시 재투여하는 방식으로 힘겹게 운영된다.

  언덕 작가가 머물던 부산 서대신동 꽃마을은 6 25 전쟁 전후 피란민들이 집단으로 산복길 터에 모여 살다가 촌락을 형성한 지역이다. 마을 주민 대부분 화전민으로 출발하여 꽃 재배로 생활을 유지했고 마을에는 꽃마을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꽃마을은 엄밀히 말하자면 재개발이 미정된 지역이다. 그러나 건설사들은 재개발을 한다며 현수막을 내걸어 주민들의 희망과 외부 투기세력들을 부추기고, 외지인들이 몰리면서 동네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곧 문제가 되자, 서구청은 '해당 지역에 도시개발사업은 없다, 현혹되지 말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부착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작가는 꽃마을에 위치한 아트인네이처 레지던스에서 매일 아침 죽은 벌레들을 치우면서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벌레가 아름다워 그들의 마지막 장에 기도하는 퍼포먼스를 발표하기로 한다. ”원주민과 예술가들이 모여 색이 어우러지면 그 특색에 사람들이 모이지만 곧 프랜차이즈와 아파트, 자본의 힘에 쓸려나가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을 늘 겪었고 이번 예술인과 주민들의 삶이 벌레만도 못하게 짓이겨진 삶터를 보며 구상했다.“는 작가의 말은 쓸려나가는 벌레들의 죽은 생명에 투사된다. 작가는 퍼포먼스 참가자들과 함께 초토화된 도시에서 발버둥치는 거대한 흰 벌레의 모습을 재현한다. 참여자들이 거대한 흰 봉투를 뒤집어쓰고 함께 보폭을 맞추고 현장을 횡단하는 장면 너머로 주름지고 찢겨지는 상처받은 껍질로부터 마침내 탈피되어 뛰쳐나오는 간절한 생명성은 끝끝내 도시자본의 나약한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하는 주체적 몸부림을 보여준다.

 

  * 본 고는 초고입니다. 불펌 및 인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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